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여기에는 별다른 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순전히 개인의 경험과 가치 판단에 의한 것임을 알고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탄압받는 호봉제

호봉제는 곧 연공서열제다. 잘 알다시피 연공서열이라 함은 나이가 많고 조직에 오래 있었던 사람에게 더 많은 급여, 혜택, 권한을 주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오래 일한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경험과 연륜이 쌓여서 더 일을 잘 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더불어 유교문화의 연장자 우대는 일본과 한국의 고도 성장기에 이 시스템이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지도록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호봉제의 몇 가지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매달 ‘호봉’이라는 월급이 몇 푼씩 오른다. 또는 두 달에 한 번씩 오르는 회사도 있다. 이건 회사가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려있다.

2. 한 번 오른 호봉은 깎이지 않는다. 하도 찔끔찔끔 오르기 때문에 깎아도 별 티도 나지 않겠지만…

3. 승진이라는 장치를 통해 몇 년에 한 번씩 크게 오를 기회가 생긴다. 보통은 한 직급 당 4~5년 정도에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 이것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직장인들은 승진에 목을 매달고 살았다. 심지어 공기업에서는 승진 시험 때 아예 일도 안하고 독서실에 쳐박혀서 공부만 하는 웃기지도 않는 짓을 했다. 아니…? 지금도 공공기관이나 공기업 어디에선가는 이런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4. 성과와 무관하다. 단 징계와는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이건 성과와 관계없이 그냥 내가 회사에 다니면서 숨만 쉬고 있으며, 크게 사고만 치지 않으면 자동으로 오른다는 의미이다.

5. 나보다 먼저 입사한 사람은 나보다 더 많이 받는다. 웬만해서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다만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특진을 통해서는 가능할 수도 있다. 왜 있지 않은가? 군대에서 사단장 테니스 공을 물고 도망간 개를 때려잡거나, 지나가는 헬기에 대고 경례를 했더니 계급이 두 계단이나 올랐다는 전설적인 얘기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봉제는 군대를 닮아 있다.

6. 상여금이라는 명목의 급여가 2개월 또는 3개월에 한 번 나온다. 이게 좀 액수가 크다. 이 제도가 적용되는 회사 직원들의 표현을 빌리면 ‘퐁당퐁당’ 방식이다. 퐁(월급)당(월급+상여금)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상여금 받고 그 달 말에 그만 둬야된다”는 말도 있다.

7. 1년에 한 번씩 물가인상율을 반영해 ‘호봉 테이블’이 일제히 1~2%, 크면 3~5% 정도 오른다. 이걸 우아한 말로 Base-up 이라고 한다.

8. 나와 같은 날 입사한 입사동기는 특진을 하거나 사고쳐서 징계를 받지 않는 한 급여와 상여금이 똑같다. 즉, 입사 몇년 차인지만 알면 얼마 받는지 손바닥 보듯이 알 수 있다. 급여가 개인별로 독립적으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호봉 테이블이라는 표에 개인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호봉제는 정말 나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호봉제를 나쁘다고 비판하기 시작한건 IMF 이후이다. 서양, 특히 미국식의 성과주의가 들어오면서 국내 기업 대부분이 ‘장착’하고 있던 호봉제는 순식간에 애물단지이자, 기업을 위험에 빠트리고, 직원들을 나태하게 만드는 주범으로 전락했다.

물론 호봉제로 인해 발생하는 큰 문제점들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심한 부작용은 ‘무임승차’이다. 가만히 숨만 쉬더라도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월급을 계속 올려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호봉제가 그렇게까지 욕을 먹어야 할 제도인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호봉제는 경제 고도 성장기에 싼값에 좋은 인력을 쓸 수 있는 제도이다. 호봉제의 바닥에 깔려있는 가정은  “우리는 계속 성장하고 있고, 우리 회사에서 낮은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시작해도, 참고 견뎌내면 당신에게 높은 보상과 지위가 주어질 것이다” 이다. 처음 인사제도 설계나 보상제도 설계 프로젝트를 했던 10여 년 전만해도 이런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럼 이제 왜 이런 가정이 가능한지 예를 들어 살펴볼까 한다.

80년대 ~ 90년대 중반 또는 회사에 따라 2000년대 초반까지 국내 대기업들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 작은 회사를 인수하고 몸집을 불리고 매출과 이익이 커지면서 조직이 계속 확대되었다. 그에 따라 조직 내 많은 기능들이 전문화되고 자리도 많이 생겨났다.

이 시절은 일을 할 사람이 없어서 난리였던 시절이다. 내 느낌에 1958년 생 ~ 1968년 생 정도가 이 시점에 대기업에서 회사를 다니던 사람들이다. 내가 대리 말 ~ 과장 초 정도 급으로 S그룹에 1년 정도 다닐 때, 우리 팀장은 정말 무능했다.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많고 성희롱도 밥먹듯이 일삼는 그런 인간이었다. 결국 그런 놈 밑에서 일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게 되었다.

그는 출근해서 신문보고 책읽고 가끔 결재하고, 그러다가 부하직원들에게 짜증내는게 하루 일과였다. 집에 가도 별로 할 일이 없었는지 퇴근도 9시를 항상 넘겼고, 내가 어쩌다가 약속이 있어 일찍 나가보겠다고 하면 “평일에 약속잡는 직장인이 어디있냐”며 대놓고 비난을 했었다. 난 정말 이 사람을 싫어했는데,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떻게 팀장이 되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사람과 함께 입사했던 그룹 계열사의 동기들 거의 대부분이 팀장 또는 초급 임원이었다.

중간에 퇴사한 사람을 빼고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일단 팀장까지 되는건 아무 문제 없었다. 이 사람의 입사와 함께 회사는 2~3년 주기로 크고 작은 인수-합병을 통해 매년 새로운 매출액 기록을 세우고 있었고, 심지어 이 사람이 팀장이 될 때는 입사했을 때보다 회사가 5배쯤은 커져 있었다.

매출액과 함께 영업이익이 가파르게 오르고, 미국, 중국, 남미 등에 적극적인 글로벌 전진 기지를 세우고 진출을 꾀했다. 한마디로 자고 일어나면 팀장 자리가 하나씩 생기는 그런 시절이다. 그러니까 자리는 많고 사람은 부족한 상황이었고, 매년 회사는 성장했기 때문에 호봉제라도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앞에서 말한 Base-up이 매년 어마어마하게 이루어졌다. 기업은 법인세 내느니 직원들 월급 더 주는게 낫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별다른 능력이 없어도 팀장되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직원들이 얼마나 신났겠는가?

하지만 회사는 그 몇 배 신났다는 것이 이 스토리의 함정이다.

물론 내가 입사할 때는 이미 연봉제가 도입된 상황이었지만, 어째튼 회사는 그 엄청난 고도 성장기에 ‘호봉제’로 사람을 묶어두고 ‘승진’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잘 부려먹은 셈이다. 물론 앞에서 든 나의 경험으로 볼 때 무임승차자를 끌고 간 것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어쨌든 회사는 커가는 규모와 이익에 비해 훨씬 낮은 비용으로 사람을 부릴 수 있었다. 호봉제 덕분에…

회사는 계속 성장했기 때문에 일을 조금만 잘해도 승진도 ‘팍팍’ 시켜주었다. 그리고 승진은 이전 직급에 비해 훨씬 큰 급여 상승을 보장했기 때문에 직원들도 함께 신났다. 속는 줄도 모르고…

그러나, 1997년 이후 이 모든 상황은 한 번에 뒤집어 졌다. IMF 라는 초유의 국가부도 사태를 맞이했고, 빚으로 유지되던 호황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구조조정, 정리해고와 같은 단어가 난무했고, 모든 기업이 필사적으로 비용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모두가 알다시피 회사의 고정비용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인건비’이다.

이 상황에 접어들면서 회사들은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외국게 컨설팅사들이 국내에 진출해 국내 기업들을 호갱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이른바 성과주의라는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연봉제라는 것들이 속속 도입된다.

나중에 성과주의 보상체계라는 것을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째튼 호봉제는 이 성과주의라는 체계 앞에서 역적 대죄인의 취급을 받기에 이른다. 비효율을 일으키는 장본인으로 호봉제가 지목되고, 성과에 따라 차등을 두겠다는 회사, 정확히 말하면 오너의 의지가 반영되어 호봉제는 회사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성장이 더뎌지게 되면 회사가 선택하는 방법들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인수합병을 통한 몸집 불리기와 시장 지배력 강화, 비용 통제를 통한 효율성 강화(안쓰고 안먹어서 절약하기), 신사업이나 연계 사업 진출을 통한 새로운 성장을 모색 등… 그러나 IMF 시절 우리 기업들은 신사업 같은건 꿈도 꿀수 없었다. 결국 대부분의 기업이 선택한 것은 비용 감축이었고, 이 중 인건비는 직격탄을 맞게 된다. 사람에 대한 회사의 태도는 돌변하게 되고, 돈버는 만큼 보상을 주겠다는 성과주의가 휩쓸면서, 연공서열 중심의 호봉제가 탄압을 받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고도 성장기에 사람들을 싼 값에 부리기 위해 사용했던 호봉제는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회사의 성과와 연동하는 인건비 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이 거의 전 산업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물론 버는 만큼 주는 것이 타당하고 합리적이다. 회사가 이익을 내지 못하는데, 인건비만 계속 오른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있다. 하지만 호봉제는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와, 고도 성장기에 위계질서와 연공서열이라는 체계와 맞물려 기업들의 인사체계를 공고히 했고, 안정적인 임금인상을 통해 많은 직장인들이 저축도 하고 계획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름의 질서와 철학적 배경이 있고, 성과를 내는 조직이라면 사람들을 안정적으로 고용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아주 단순한 장치였다.

호봉제가 작동하는 조건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호봉제가 작동하는 것은 어떤 조건일까? 첫번째, 안정적이고 변화가 크지 않은 old Industry의 경우 작동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IoT, 알파고 등 산업 전반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일들이 여기 저기서 벌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old Industry는 호봉제가 어느 정도 유효할 수 있다. 물론 시장의 크기가 더 커질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약점이 있지만 꾸준하고 일정한 수요와 지속적인 공급이 가능한 산업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두 번째, 업력과 경험이 중요한 도제식 산업의 경우 어느 정도 유효할 것이다. 업력과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은 나이가 많고 오래 그 일을 한 사람이 더 일을 잘 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필요조건은 아니다. 즉, ‘그 바닥에서 더 오래 구른 사람’의 불량률이 낮고, 더 빠르다는 것이다. 농수축산업, 원예업 등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웃기는 것은 ‘경영컨설팅’이나 ’리서치’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이 논리가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튼 마지막으로 결론은 ‘호봉제’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진짜 죄라면 성장이 멈춘 이 사회의 전반적인 경제 구조와 단기성과만 쪽쪽 빨아먹고 성장에는 관심이 없는 경영자이다. 호봉제에서 연봉제 또는 성과중심 보상으로의 전환은 어쩌면 성장이 멈춘 이 시대에 직원들의 멀쩡한 팔목까지 비틀어 쥐어 짜는 비용절감의 필요성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전반적인 조직구조가 ‘성과’ 중심으로 바뀌지 않은 채, 보상제도만 성과에 기반해 바뀐다고 정말 ‘성과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까? 업무는 여전히 위계에 근거한 직급체계를 따라 보고하고 업무를 처리하면서, 보상제도만 성과 중심으로 한다? 낮은 직급도 성과를 내면 정말 자신보다 높은 직급의 직원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은 그냥 그림으로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지, 대부분의 회사에서 구현되는 일은 없다. 특히 국내 대기업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Human Resource는 그나마 사람을 자원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과주의의 탈을 쓴 인건비 절감의 노력은 사람을 ‘비용’으로 보는 철학적 관점의 변화를 가져왔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